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르살루스 전투 (문단 편집) == 전선 배치 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Battle_of_Pharsalus.png]] 폼페이우스는 좌익에 기병을 집중 배치했고, 중무장 보병을 크게 3분하여 좌익에 한때 카이사르의 휘하에서 싸웠던 1군단과 3군단(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지휘),[* 크라수스의 [[파르티아]] 원정 당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휘하 군단을 크라수스 휘하에 파견할 것을 결의했는데, 이를 카이사르가 독박(...)을 쓴 셈이 되었다. 과거 폼페이우스의 군단 편성 권한을 빌려 편성한 군단을 폼페이우스가 파견한다고 선언한 것(...). 결국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단을 빼앗긴 셈이 되었다. 물론 이 군단들은 폼페이우스가 꽉 틀어쥔 돌이 되었다.] 중앙부에 시리아 주둔군([[메텔루스 스키피오]]), 우익([[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]] 혹은 렌툴루스)에 킬리키아 주둔군과 로마식으로 훈련된 히스파니아 용병들을 포진시켰다. 좌익 끝에는 [[라비에누스]]가 지휘하는 6400기의 기병이 집결해 있었다. 전형적인 [[망치와 모루 전술]] 형태의 배치였다. 카이사르 역시 비슷한 편성을 취했다. 우익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[[10군단 에퀴스트리스|10군단]], 좌익은 [[마르쿠스 안토니우스]]의 [[8군단 아우구스타|8]], [[9군단 히스파나|9군단]], 중앙은 [[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]]가 맡았다. 단 우익의 경우 술라는 명목상의 지휘관이었고, 카이사르가 10군단과 함께 전투 내내 그곳에 머물며 중요한 전술적 결정을 직접 내렸다.[* 사실상 군대 전체 지휘를 카이사르가 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. 안토니우스는 그렇다고 치더라도, 술라나 칼비누스 둘 다 군사적으로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. 특히 도미티우스는 이 전쟁 이후에 짬이 좀 찼는데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참패를 당했다. 그러나 처음부터 카이사르 편에 섰던 몇 안 되는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옥타비아누스 시절까지 중용받는다.] 절대적인 기병 전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고참병 2천여 명을 따로 분리해 별동대를 편성했고, 기병과 경보병을 결합해 폼페이우스의 기병을 차단하고자 시도했으며, 이 시도는 회전에서 제대로 먹혀들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